슬픈 카지노 이야기

언제쯤…

언제쯤 일까…

언제쯤 이 이야기를…

언제쯤 일까 했습니다…

이 카페에 들어오고 언제쯤 이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했습니다.

전 카지노에서 두 사람을 잃었습니다.

한 사람은 지금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미국에서 저를 카지노로 데려간 친구이고

또 한 사람은 제 마음에서 떠나 화해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화해 못 한 여한이 있는 그 분 얘기는 평생 가슴에 묻고 살 것 입니다.

오늘은 제가 미국서 처음 이자 마지막으로 카지노에서

인연을 맺은 친구 얘기를 하려 합니다.

그 친구는 성이 김이라 케이로 하겠습니다.

케이를 만난 것은 제가 살던 뉴욕 후러싱서 제일 큰 한인 교회 대학부 였습니다.

케이는 뉴욕에 저보다 이른 나이인 고등 학교 때 이민 왔습니다.

케이의 부모님 두 분 다 의사 이시고 한국서 제법 큰 병원을 운영하시다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 가셔서

병원을 정리 하고 어머니와 이민 온 외아들 입니다.

당시 한국서 미국에 올 때 적은 돈도 쉽게 못 가져오는 시대 였는데

어떻게 돈을 가져왔는지는 몰라도 큰 집에 여유 있게 사는 친구 였습니다.

어머니도 의사이심에도 불구하고 별로 하는 일 없이 집에서 소일 하고 계셨습니다.

케이는 카지노 가는 것을 무척 좋아 했습니다.

하루는 교회 대학부의 친구 몇을 모아서 케이가 뉴욕서

가까운 A.C 아틀란틱 시티 카지노를 데려 갔습니다.

제가 카지노에 첫 발을 디디는 날은 무척 화창한 봄 날 이었습니다.

그 따듯함이 저를 환상의 세계로 초대 했고 전 꿈의 동산에 온 듯 하였습니다.

그 후 저는 카지노에 빠져 잠시 방황 하다가 어머니의

눈물 어린 호소에 마음을 바꿔 발을 끊었습니다.

물론 케이는 계속 카지노를 출입 하였고 저와의 관계는 소원 해졌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 저는 한국 건설 회사의 뉴욕 지사에

잠시 근무 하다가 사업 쪽으로 발을 돌렸습니다.

당시 80년대는 뉴욕에 사는 한인에게는 호경기 였습니다.

특히 제가 종사 했던 브로드웨이 도매 무역업은 잘 만 하면

돈방석에 앉는 사업 이었습니다.

저도 악세사리 무역과 도매를 하여 적지않은 돈을 만지기도 했던

그야말로 뉴욕 한인의 황금기 였지요.

저도 돈을 좀 벌기도 하여 한동안 안 갔던 A.C의 카지노도 가끔 가곤 하였습니다.

그러다 그 곳서 대학 졸업 후 교회도 안 나가 한동안 못 맜났던

케이를 시저스 카지노에서 만났습니다.

우린 무척 반가워서 서로의 안부를 물었더니 케이는 결혼 하였고

하는 일은 집사람을 도와서 네일 샾 여러개를 운영 한다고 합니다.

케이는 라스베가스에 자주 갔다가  카지노 딜러인 세 살 연상의

한국 여자를 만나 결혼 하여 뉴욕으로 데려 왔답니다.

결혼식을 어머니만 모시고 한국에 나가서 하느라

친구들에게도 연락을 안했다고 합니다.

그는 집에 재산이 많아 여유롭게 살았는데

억척 부인을 만나 삶은 더 윤택 해졌습니다.

당시 뉴욕은 손톱과 발톱에 매니큐어 해주는 네일 가게가 크게 번창 하였는데

억척 부인이 그 계통에서 성공 하여 가게를 몇 개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케이는 아침에 가게문 열고 저녁에 닫는 셔터맨 노릇을 하면서

낮에는 골프 치고 밤엔 시저스 카지노나 가는 그런 한량이 되어 있었습니다.

케이는 시저스 VIP로 리무진을 콜하면 카지노에서 무료로 보내주었고

저도 카지노 갈 때마다 그 덕을 보았습니다.

처음엔 만불로 시작 했다가 이제는 오천불(80년대는 적지 않은 돈 입니다)만

칩스 교환 해도 스위트 룸에 룸서비스 음식까지 모두 프리로 받았습니다.

저는 케이를 다시 만나고 리무진 서비스의 매력에 빠져

카지노 가는 횟 수가 늘기 시작 했습니다.

적지않은 돈도 들었지만 워낙 경기가 좋아 그런대로 다닐만 했습니다.

케이도 와이프의 수입이 한달에 종업원 일년 수입을 벌었고 집에

원래 돈이 많아 별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케이는 진짜 갬블러 였습니다.

전 카지노 가면 맥주 마시며 게임 하는데 케이는 절대

술도 안먹고 게임 할 때는 거기에만 집중 합니다.

블랙잭시 딜러가 버스트가 되든 21을 꼿던 항상 표정은

약간 비웃는 듯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일관된 표정 입니다.

대개의 갬블러가 갖는 무표정이 아닌 그 비웃는 듯한 모습이

이건 중국 영화에 나오는 도신 같았습니다.

승률도 다른 사람에 비해 좋은 편 이었고 챤스 벳을 잘 쓰는데

미니멈에서 맥스멈으로 갑자기 올리면서 베팅 하여 먹는

경이로움을 잘 보여 주곤 했습니다.

시저스 핏보스도 혀를 내둘르는 실력을 보이곤 했지요.

당시 A.C카지노에서 일하는 딜러들은 오프시 다른 호텔 카지노에

가서 게임을 하였는데 케이의 바카라 실력도 소문나서 인기가 좋아

딜러들이 같이 게임 하기를 청 할 정도 였습니다.

타고난 냉철함과 카운트에 능한 명석한 두뇌는 그를 갬블러로 만들었습니다.

뉴욕의 한인들은 사업을 하여 큰 돈도 만졌지만

 A.C의 카지노에 전재산을 날린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 케이는 잘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케이는 저에게 무역을 가르쳐 달라고 하며 저와 같이 한국에 나가겠답니다.

이유 인 즉 와이프에게 서울의 워커힐 카지노에 갈 빌미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 이지요.

저는 카지노 사부인 케이의 청을 거절 못하고 케이를 데리고 한국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한국에 나오면 당시 서울서 사우나가 제일 크고 나이트 클럽에

조용필이 나오는 리버사이드 호텔에 묵었는데

케이와 서울에 와서는 워커힐 호텔에 묵기 시작 했습니다.

워커힐 파라다이스 카지노…

말 그대로 케이에겐 지상 낙원 이었습니다.

허나 파라다이스 카지노가 케이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될 줄은 저도 그도 몰랐습니다.

지금은 당시보다 두배로 확장 했지만 미국에 비하면 아담하기 짝이 없는 카지노가

미국 카지노에서도 버텼던 케이를 서서히 무너트렸습니다.

지금 워커힐 카지노는  아줌마 딜러도 많지만 80년대에는

여자 딜러 정년이 35세 인가 였고 탈렌트 뺨치게 이쁜 아가씨가 많은

워커힐은 케이를 홀리고 말았습니다.

게임 중 절대 말을 안하던 케이가 워커힐 아가씨 딜러와는 게임 하면서

대화를 하며 우스개 소리도 하기 시작 했습니다.

한번도 못 보던 행동을 고국이라는 편안함에 하나보다 생각 했습니다.

미국서는 리무진 타기 위해 5천불은 바꿔도 무척 약게 미니멈을 이용 하며

게임 하던  케이는 한국서는 베팅에 허세가 들어 가기 시작 했습니다.

한국에서 당시 재미교포는 어느정도 인기가 있었고

더군다나 호텔에 묵는 젊은 사업가는 카지노 여자 딜러 한테 대우를 받았습니다.

케이는 갬블러 답지 않게 워커힐에서는 허세를 부리기 시작 하여

베팅도 전 보다 훨씬 커졌습니다.

그 뿐이 아니라 처음엔 저랑 같이 행동 하던 그가 한국에 두번째와서는 일정이 다 되어

저는 미국에 돌아 가는데 비행기 표를 연기 하고 한국에 남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때 저는 케이의 청을 받아들여 그의 와이프를 설득 하고

그를 제 사업에 동참 시킨 것을 후회 하였습니다.

그래도 달래서 미국에 데려 갈려 했으나 막무가내 였습니다.

할 수없이 저 혼자 돌아가고 케이의 아내에게는

한국에 일이 있어서 남아 있다고 말 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케이 와이프는 그가 적지않은 돈을 제품 구입에 쓴다고

가져간 사실을 저에게 말 하였습니다.

저는 그 때 뒷통수를 맞은 듯 하였고 그 만한 돈은 미국 나가고

한국 들어 갈 때 문제가 되는데 어떻게 가지고 갔나도 궁금도 했습니다.

그래도 카지노 같이 다니며 우정을 쌓아 갔고 저보다 한살 많은

케이를 친구이자 형 처럼 의지 했는데

이렇게 속일 수가 있나 하는 맘에 서운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속인건 아니고 저에게 말을 안 한 것 뿐이지요.

워커힐 호텔 숙소에 전화를 넣었더니 체크 아웃을 하였다 하여 연락도 끊겼습니다..

전 걱정이 돼서 일이 손에 안 잡히고 하여

다음 일정 보다 더 빨리 한국에 출장을 갔습니다.

한국 도착 하자마자 워커힐 카지노에 가니 그가 없었습니다.

안면이 있는 핏보스에게 물으니 요새 한동안 안보인 답니다.

저는 앞이 캄캄 했습니다…

오늘은 여기가지 하겠습니다.

독수리 타법에 두시간 이상을 친거고 눈이 침침해 더 이상은 힘들군요.